퇴직연금 가계부에 넣기 전 볼 4가지 숫자

10년 넘게 가계부를 쓰면서도 퇴직연금은 한동안 잔액만 확인했습니다. 당장 생활비로 쓸 돈이 아니라는 이유였죠. 그런데 어느 날 월 지출은 몇 천 원까지 따지면서, 더 큰 금액이 쌓인 계좌의 운용 내역은 모르고 있다는 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퇴직연금도 가계부처럼 숫자 몇 개를 적어두면 훨씬 덜 막막합니다.
1. 내 계좌가 DB형인지 DC형인지
먼저 회사 퇴직연금이 확정급여형(DB)인지 확정기여형(DC)인지 확인합니다. 고용노동부 안내에 따르면 DB형은 받을 퇴직급여의 산정 방식이 정해져 있고 회사가 적립금을 운용합니다. DC형은 회사가 매년 임금총액의 12분의 1에 해당하는 부담금을 내고, 근로자가 적립금을 운용합니다. 같은 퇴직연금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다른 셈입니다.
개인형 퇴직연금(IRP)은 퇴직급여를 받아 관리하거나 본인이 돈을 더 납입할 때 쓰는 계좌입니다. 회사의 DB형·DC형 가입 여부와 별개로 IRP를 가질 수 있습니다. 제도를 바꿀 수 있는지부터 고민하기보다, 급여명세서나 회사 안내에서 현재 유형을 확인하는 게 순서입니다.
- DB형이라면 퇴직급여 예상액과 회사의 제도 안내를 확인합니다.
- DC형이라면 회사 부담금 입금 내역과 내가 고른 운용상품을 확인합니다.
- IRP가 있다면 퇴직급여로 들어온 돈과 내가 추가 납입한 돈을 구분해 봅니다.
특히 DC형은 회사가 낸 금액과 계좌의 현재 평가금액이 다를 수 있습니다. 투자 결과가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잔액 하나만 적으면 그 차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2. 잔액 옆에 납입액과 비용도 적기
가계부에 월말 잔액만 적으면 이번 달에 얼마를 벌고 썼는지 알 수 없죠. 퇴직연금도 비슷합니다. 저는 확인할 숫자를 세 칸으로 나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들어온 돈, 현재 평가금액, 계좌와 상품에 드는 비용입니다.
예를 들어 누적 납입액이 3,000만 원이고 평가금액이 3,120만 원이라면 차이는 120만 원입니다. 다만 이 숫자만으로 연 수익률을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돈이 들어온 날짜가 제각각이고 중간에 상품을 바꿨을 수도 있으니까요. 금융회사 화면에서 기간별 수익률과 수수료를 함께 확인해야 비교가 됩니다.
비용도 작은 글씨로 넘기기 쉽습니다. 가령 같은 조건에서 연간 비용이 0.4%와 0.2%라면, 3,000만 원 기준 차이는 한 해 약 6만 원입니다. 실제 비용은 계약과 상품, 부과 방식에 따라 달라집니다. 수익률이 높은 상품을 급히 찾기 전에 내가 현재 어떤 비용을 내는지 보는 편이 차분한 출발점입니다.
DC형이나 IRP에 가입했다면 운용상품도 한 번 펼쳐 봅니다. 원리금보장 상품인지, 가격이 오르내리는 펀드인지, 언제 만기가 돌아오는지 정도면 충분합니다. 사전지정운용제도에 가입했다는 사실만으로 내 계좌가 지금 원하는 방식으로 운용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3. 세액공제 한도보다 월 여유자금 계산하기
IRP에 돈을 더 넣을 때는 연말정산 혜택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국세청 안내상 연금저축과 퇴직연금을 합친 세액공제 대상 납입한도는 연 900만 원이고, 이 중 연금저축 한도는 600만 원입니다. 공제율은 총급여 5,500만 원 이하라면 15%, 그보다 높으면 12%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비율은 지방소득세를 제외한 소득세 기준이고, 실제 공제액은 납부할 세금 등에 따라 달라집니다. 회사가 DC형에 내는 부담금은 내 추가 납입액으로 계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도를 채우려고 생활비를 억지로 줄일 필요는 없습니다. 월 실수령액이 300만 원, 고정비와 평균 생활비가 260만 원인 집이라면 남는 40만 원이 전부 노후자금은 아닙니다. 경조사비나 병원비처럼 매달 나오지는 않아도 언젠가 쓸 돈이 있으니까요. 이런 지출을 위한 현금이 부족하다면 IRP 추가 납입보다 생활 예비비가 먼저일 수 있습니다.
월 10만 원을 무리 없이 낼 수 있다면 연 120만 원입니다. 총급여가 5,500만 원 이하이고 공제받을 세금이 충분하다는 가정에서는 소득세 세액공제액이 18만 원입니다. 숫자는 제법 반갑지만, 그 120만 원은 당장 꺼내 쓸 생활비와 다르게 다뤄야 합니다. 저는 연말정산 예상액보다 내년에도 같은 금액을 꾸준히 낼 수 있는지를 먼저 봅니다.
4. 퇴직금을 받기 전에 쓸 시점 그려보기
퇴직 시점에는 IRP로 들어온 돈을 연금으로 받을지, 일시금으로 받을지 고민하게 됩니다. 세금과 수령 조건은 돈의 출처, 나이, 받는 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 금융회사 안내에서 본인 계좌 기준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DC형 적립금이나 IRP의 돈도 필요할 때 언제든 자유롭게 꺼낼 수 있는 생활비 통장처럼 생각하면 계획이 꼬이기 쉽습니다.
가계부에는 퇴직연금과 별도로 퇴직 직후 1년의 예상 지출을 적어두면 좋습니다. 예를 들어 매달 생활비가 250만 원이고 새 소득이 없다면 1년 생활비만 3,000만 원입니다. 여기에 건강보험료, 대출 상환, 이사비처럼 상황에 따라 달라질 항목을 더하면 필요한 현금 규모가 보입니다. 그 숫자를 알아야 퇴직급여를 얼마나 오래 남겨둘지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퇴직연금은 멀리 있는 큰돈처럼 느껴지지만, 관리하는 방식은 평소 가계부와 닮았습니다. 계좌 유형을 알고, 들어온 돈과 현재 금액을 구분하고, 월 예산에서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보태는 일입니다. 몇 달에 한 번 이 숫자들을 다시 보는 습관이면 충분히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