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퇴직연금 시작 전 확인할 5가지 가계부 기준

얼마 전 가계부를 넘기다가 6년 전 제가 처음 개인퇴직연금에 넣었던 금액을 봤습니다. 그때 월 10만 원으로 시작했는데, 솔직히 처음엔 노후 준비라기보다 연말정산 때 세액공제를 조금이라도 챙기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그런데 10년 넘게 가계부를 쓰다 보니 알겠더라고요. 개인퇴직연금은 ‘많이 넣는 사람’보다 ‘매달 빠져도 생활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에게 더 잘 맞습니다.
개인퇴직연금은 보통 IRP라고 부릅니다. 퇴직금을 받는 계좌로도 쓰이고, 개인이 추가로 돈을 넣어 노후자금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름은 조금 딱딱하지만 가계부 입장에서는 아주 단순합니다. 매달 고정지출처럼 빠지는 장기 저축입니다. 다만 중간에 쉽게 빼 쓰기 어렵고, 세금 혜택을 받은 돈은 나중에 꺼낼 때 규칙이 붙습니다. 그래서 시작 전 숫자를 먼저 보는 게 좋습니다.
1. 월 납입액은 의지보다 잔액으로 정한다
개인퇴직연금을 시작할 때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세액공제 한도’부터 보는 겁니다. 물론 한도는 중요합니다. 연금저축과 IRP를 합쳐 연간 900만 원까지 세액공제 대상이 될 수 있고, 소득 구간에 따라 13.2% 또는 16.5%의 세액공제율이 적용됩니다. 계산만 보면 연 900만 원을 꽉 채우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연 900만 원은 월 75만 원입니다. 가계부에서 월 75만 원은 작은 돈이 아닙니다. 월급 320만 원인 사람이 주거비 90만 원, 식비 65만 원, 보험과 통신비 35만 원, 교통비 15만 원, 부모님 용돈이나 아이 학원비까지 쓰고 나면 실제 남는 돈은 생각보다 얇습니다. 이 상태에서 IRP에 75만 원을 넣으면 노후 준비는 하는데 이번 달 카드값이 밀리는 이상한 상황이 생깁니다.
저는 개인퇴직연금 납입액을 정할 때 ‘3개월 평균 잉여금’의 절반을 기준으로 잡는 편입니다. 예를 들어 최근 3개월 동안 월평균 40만 원이 남았다면 처음 납입액은 20만 원 정도가 편합니다. 남은 20만 원은 비상금이나 변동지출로 둡니다. 이렇게 해야 갑자기 병원비, 경조사비, 자동차 수리비가 나와도 계좌를 흔들지 않습니다.
2. 세액공제는 보너스지만 목적이 되면 부담이 된다
개인퇴직연금의 가장 눈에 띄는 장점은 세액공제입니다. 총급여 5,500만 원 이하 근로자라면 세액공제율이 16.5%로 적용되는 구간이 있고, 900만 원을 꽉 채우면 최대 148만 5천 원 수준의 세금을 줄일 수 있습니다. 그보다 소득이 높은 구간에서는 13.2%가 적용되어 최대 118만 8천 원 정도입니다. 숫자로 보면 꽤 큽니다.
하지만 여기서 가계부식으로 다시 봐야 합니다. 세금을 100만 원 넘게 아끼려고 900만 원을 묶는 구조입니다. 즉, 당장 현금흐름이 넉넉하지 않다면 세액공제보다 생활 안정이 먼저입니다. 세금 환급액은 다음 해에 들어오지만 납입액은 매달 빠져나갑니다.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권하는 방식은 처음부터 한도를 채우지 않는 겁니다. 월 10만 원이면 연 120만 원, 월 20만 원이면 연 240만 원입니다. 작아 보여도 세액공제 효과가 있고, 무엇보다 습관을 만들 수 있습니다. 1년 동안 무리 없이 유지했다면 그다음 해에 월 5만 원이나 10만 원씩 올리는 방식이 훨씬 오래 갑니다.
3. 중도해지 가능성부터 냉정하게 본다
개인퇴직연금은 단기 저축통장이 아닙니다. 만 55세 이후 연금으로 받는 것을 전제로 설계된 계좌입니다. 중간에 급하게 해지하면 그동안 받은 세액공제 혜택을 되돌리는 성격의 세금이 붙을 수 있고, 생각보다 손에 남는 금액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필요하면 빼 쓰지 뭐’라는 마음으로 넣기에는 맞지 않습니다.
가계부에서 먼저 확인할 것은 비상금입니다. 최소 3개월치 생활비가 따로 있어야 개인퇴직연금 납입이 편해집니다. 월 생활비가 250만 원이면 750만 원 정도는 예금이나 CMA처럼 바로 꺼낼 수 있는 곳에 두는 게 좋습니다. 이 돈이 없는데 IRP부터 채우면, 작은 사고에도 장기자금을 깨게 됩니다.
특히 전세 이사, 출산, 육아휴직, 이직 준비, 자영업 전환처럼 앞으로 1~2년 안에 큰 현금흐름 변화가 예상된다면 납입액을 작게 가져가는 편이 낫습니다. 개인퇴직연금은 많이 넣는 것보다 깨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4. 상품 선택은 수익률보다 내가 견딜 변동성이다
IRP 계좌를 열면 예금, 펀드, ETF 등 여러 상품을 고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수익률 높은 상품만 보면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런데 가계부를 오래 쓰며 느낀 건, 사람마다 견딜 수 있는 손실 폭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같은 마이너스 10%라도 누군가는 기다리고, 누군가는 밤에 앱을 계속 열어봅니다.
예를 들어 월 30만 원씩 넣는 사람이 주식형 자산 비중을 70%로 가져가면 장기적으로 기대수익은 높아질 수 있습니다. 대신 시장이 안 좋을 때 계좌 평가액이 크게 흔들립니다. 반대로 예금 위주로만 두면 마음은 편하지만 물가상승률을 이기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둘 다 장단점이 있습니다.
처음이라면 단순한 비율로 시작해도 됩니다. 예금성 50%, 주식형 또는 채권형 펀드 50%처럼 나누고, 6개월 정도 내 반응을 보는 겁니다. 손실 구간에서 납입을 멈추고 싶어진다면 위험자산 비중이 높은 겁니다. 반대로 계좌 변동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면 조금씩 조정할 여지가 있습니다.
5. 개인퇴직연금은 소비 습관을 바꾸는 장치가 될 수 있다
제가 개인퇴직연금을 좋아하는 이유는 대단한 투자상품이라서가 아닙니다. 매달 먼저 빠져나가는 구조가 소비 습관을 바꿔주기 때문입니다. 월급이 들어오고 남는 돈을 저축하려고 하면 거의 남지 않습니다. 그런데 월급일 다음 날 IRP로 20만 원이 빠져나가게 해두면, 남은 돈 안에서 생활을 맞추게 됩니다.
다만 이 방식은 납입액이 적당할 때만 효과가 있습니다. 너무 많이 설정하면 생활비가 부족해지고, 결국 카드 할부나 마이너스통장으로 메우게 됩니다. 그러면 노후 준비를 하면서 현재 재무상태가 나빠지는 모순이 생깁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퇴직연금을 시작할 때 세 가지 숫자를 같이 적습니다.
- 최근 3개월 평균 생활비
- 최근 3개월 평균 남는 돈
- 현재 바로 쓸 수 있는 비상금
이 세 숫자를 보면 납입 가능한 금액이 꽤 선명해집니다. 월 10만 원이든 30만 원이든 내 생활에 맞으면 괜찮습니다. 노후 준비는 남들보다 큰 금액을 넣는 경쟁이 아니라, 내 가계가 무너지지 않는 선에서 오래 이어가는 습관에 가깝습니다.
개인퇴직연금은 잘 쓰면 세금도 줄이고 노후자금도 만드는 좋은 도구입니다. 하지만 가계부 숫자와 맞지 않으면 부담스러운 고정지출이 됩니다. 저는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한도보다 유지 가능성을 먼저 봤으면 합니다. 10만 원을 10년 넣는 사람이 75만 원을 6개월 넣고 해지하는 사람보다 훨씬 멀리 갑니다.
